신상은 단우와 인터뷰를 위해 몇 차례 통화하고 5월 26일 오후에 흥사단 이사장실에서 인터뷰하기로 하였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 신상은 단우는 연휴 기간 동안 DMZ 걷기 모임과 남도 트레킹으로 인해 인터뷰 준비를 제대로 못했다며 양해해달라는 말씀을 전했다. 신상은 단우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몰랐던 그의 삶의 태도와 경험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김태석 단우가 함께하였다.
문 : 단우님의 인생에 있어서 흥사단은 어떤 의미입니까?
답 : 6·25 전쟁의 절망과 혼돈의 시기, 정치·사회적으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암담한 시대에 흥사단은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저는 ‘금요강좌’를 통해 흥사단을 알게 되었어요. 흥사단을 알게 된 건 나의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이었으며 내 평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감히 흥사단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고 싶네요.
문 : 흥사단을 알게 한 금요강좌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답 : 황산덕 서울대 법철학 교수의 강론이 생각나는군요. 당시 청년은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매우 높았고 암울했던 시대 상황으로 인해 청년은 힘든 상황이었죠. 이러한 청년들을 어루만져주는 주제로 황산덕 교수는 강의했는데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4·19 이후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한태연 법학 교수의 강론 역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젊은이들의 고뇌를 대변하였죠. 이렇게 금요강좌 자체가 답답한 현실을 대변해 주는 장이었어요. 금요강좌 홍보 유인물은 대성빌딩 주변에 6장을 붙인 것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대성빌딩 강당은 꽉 차고 밖에까지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어요. 금요강좌에 온 사람 3분의 1이 대학생이었고, 금요강좌를 통해 입단한 사람이 많았어요.
문 : 흥사단을 알게 된 계기가 금요강좌였다면, 흥사단 활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큰 답 : 영향을 준 단우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선배 1세대 단우인 김선량 단우입니다. 김선량 단우는 기독교 장로셨는데 제가 교회에서 성가대를 한다는 것에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그리고는 박현환 선생과 흥사단을 소개해 주었지요. ‘흥사단’이란 책을 내게 주시면서 “한번 읽고 이해가 안 되면 두 번 읽고 찾아오시게. 그러면 도산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죠. 제가 입단을 할 때는 예비단우 수련을 무척이나 강조했죠. 약법을 해석할 수 있어야 했고, 도산 전기는 반드시 읽어야만 했죠. 이러한 수련은 선배 단우를 통해 채워질 수 있었어요. 김선량, 박현환, 주요한, 장리욱, 김윤경, 최희송, 김병연, 김재순 단우님과 교류하면서 서로를 격이 없이 아껴주고 친가족처럼 대해주셨어요. 접하기도 편했고, 대화도 잘 통했어요. 최희송 단우님은 유학생활에서의 어려움을 소개해 주었죠. 그러면서 영어를 알아야 한다면서 이사장 방에서 회화를 가르쳐 주었고, 연세대 교수였던 김윤경 단우님은 자신의 강의 내용을 소개해 주었죠.
문 : 입단하신지가 꽤 오래되셨는데 기억에 남는 흥사단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입단한 지 60년 가까이 되는데, 단에서 직분을 맡은 건 심사원과 심사회장, 초대 청년회장을 맡은 거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네요. 초대 청년회장을 맡았을 때 포항제철 본사에 근무하게 되어 이마저도 물러나고 김종림 단우에게 물려주었죠. 심사회장을 하면서 행정에 대해 빈틈이 없을 것과 회계 원칙을 강조했죠. 그리고 예비단우 훈련을 강화했죠. 다른 기억에 남는 일은 ‘흥사단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도전 100좌를 시행했는데, 그 도전에 12명이 성공했고, 10번째로 성공한 이가 저입니다. 성공과 등수를 떠나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한 것에 자긍심과 보람을 느낍니다.
문 : 흥사단 활동을 통해 맺은 특별한 인연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흥사단에 담당 경찰서 정보계 형사가 상주해 있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느 날은 그 형사에 내게 와서는 “국영 기업체에 다니면서 이런 활동을 해도 되는가?”라며 겁을 주었죠. 당시에 정당·사회단체에 활동하면 파면이었죠. 웃으면서 넘어간 적도 있었고, 담배를 권하기도 했어요. 그 형사는 4·19 혁명 이후 반민주화 인사로 체포되었는데, 흥사단에서 100여 명이 진정서를 보내 풀려나는 데 일조했죠. 이 일을 계기로 형사는 흥사단에 고마워했고, 흥사단 행사가 열리면 가끔 오셨습니다.
문 : 좌우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중학교 때 6·25 전쟁이 발발했어요. 피난처에 모여 있는데 어느 군인이 와서는 15살이면 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군에 입대해 상주로 이동하여 간단한 훈련을 받고 군인이 되었죠. 근데 군인 사회는 아주 별로였어요. 욕설, 술, 담배가 난무했거든요. 그래서 결심했죠. 담배, 술을 하지 않고 나쁜 말을 쓰지 않겠노라고 그때부터 저의 좌우명을 ‘성실’로 삼았습니다. 성실은 군인 사회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죠. 그 후로 군에 계시는 목사님을 만나 복음을 들으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죠. 이후 전쟁이 끝나고 대학 시절에 흥사단과 도산을 만났죠. 저의 성실은 흥사단의 4대 정신과 융화되어 올바른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거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성실은 흥사단에 큰 애착을 갖게 한 것 같네요.
문 : 끝으로 흥사단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답 : 요즘 월례회나 신년회, 토론회를 보면 참석률이 너무 낮아요. 50명이 채 모이지 않은 경우가 있죠. 우리 단이 잘 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많아야 합니다. 창립 102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창단 이념을 계승하면서 기본과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위해서는 힘을 보태고 기본을 지켜야 합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지지와 성원의 표현이지요.
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말에 대한 믿음을 줘야 합니다. 이는 약속으로 발현될 수도 있고, 서로의 신뢰감으로도 표현될 수 있죠. 믿음은 전통을 이어가는 버팀목이자 상대방의 행동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제가 2013년 ‘도산의 발자취’를 따라 여러 단우와 함께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리버사이드 시티에 있는 도산 동상을 찾았죠. 한때 도산 동상을 제작하기 위해 모금을 한 적이 있었는데 기부자에게는 현판에 이름을 적어준다는 말이 생각났죠. 혹시나 해서 현판을 봤는데 제 이름이 있는 거예요. 약속을 지켜준 거죠. 그것을 보고 생각난 것은 무실이었어요.
<기산(氣山) 신상은 단우>
氣山 신상은 단우는 1931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월남해서 서울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여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는 등 고난을 겪었다. 1959년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마친 후 국영기업체인 대한중석 및 포항종합제철 근무를 거쳐 최근까지는 유성티엔에스 대표이사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