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기념사업회> '2015년 도산안창호글짓기공모전 대상' 수상작
자아완성과 투사의 길
많은 민족투사들이 당대의 불꽃으로 격렬히 타올랐다가 역사책으로 들어간 뒤 박제되어 버렸다. 도산이 3.1절에 불려나왔다가 사라졌다가 8.15일에 불려나왔다가 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과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자아혁신과 일상에 기반한 생활철학을 실천했던 독립투사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산 스스로 의관정제를 제일로 삼고, 화분 등으로 집안 가꾸기에 나서며, ‘오렌지하나를 잘 따는 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말한 것만 봐도 공생애로만 기록될 뿐인 여느 투사들과 다르지 않은가. 나는 이 사인의 삶이 인간의 참 역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기본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에 정성을 기울인 모습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다.
흔히 큰일을 하는 사람은 큰 그림만 보려 하고 나머지는 밑에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한다. 일견 그 말이 옳지만 그와 같은 행동을 강조한 정객 치고 큰 과오를 범하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런 인물들은 일단 자신의 몸가짐이 정제되지 못하고 앎에 게을러 무지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다른 이가 대신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큰사고를 쳐왔다. 자신의 몸가짐은 누가 대신할 수 없고, 무지를 옆에서 무마해줄 행운이 항상 예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에 밥풀을 남기지 않는 식사예절을 우습게 아는 이들이 많지만, 제 밥그릇 하나 제대로 긁어 먹지 못하는 자가 무슨 큰일을 하겠는가. 작은 것을 완벽하게 해내면 자신에게 이롭고 지역사회가 투명해지고 결국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도산의 가르침은 인간수양의 티핑 포인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미세한 균열 하나가 벽 전체를 붕괴시키듯이 작은 실천 하나가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을 도산은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도산은 작은 것의 전파력을 지적한 티핑 포인트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인간 행동의 요체를 담고 있지만 공허하다. 좀 더 실행적인 지행합일(知行合一)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에 부합하는 모델을 제시받았지만 내가 별달리 감동하지 못했던 것은 그 모델들에게서 세속적인 성공만 강조될 뿐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 탓이리라. 나는 보다 진솔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모델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는 말에서 나아가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대한 독립을 위해 일해 왔다’고한 도산을 만나고서 다른 모델을 찾기를 그만두었다. 한때 친일로 얼룩진 춘원의 입을 빌린 것이지만 <도산 안창호>에서 도산을 지근거리에서 봐왔던 그의 책 속에 남아있는 도산은 비교적 세세하게 남아있었다.
자아혁신은 도산의 처음이고 대한독립은 끝이었다.
그에게서 자아혁신은 모든 일을 이루는 기초였던 셈이었다. 그에게는 자아완성을 개인으로 끝마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로 연장해서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아에 대한 끝없는 단속은 종교의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항시 바깥으로 열려 있었다. 사회와 국가는 자아가 완성되어야 하는 궁극적인 실험의 장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점검 없이 행해지는 국가 대소사는 공중누각에 그칠 것임을 도산은 깊이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릇된 욕망으로 망쳐온 한국 현대사의 인물들을 보면 자아에 대한 각성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것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들은 시대가 자신을 낳았을 뿐이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사실 자신들 안에 들끓고 있었던 권력욕을 제어할 자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 권력욕의 전차에 탄 사람들에게 도산의 가르침은 한갓 나약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더불어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평전>에서는 도산의 생활인으로서의 면모와 고매한 인격이 그대로 일제에 항쟁을 결단하는 투사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애기애타(愛己愛他),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의 일을 철저히 하는 것에서 모든 일의 근본으로 삼는 양상은 개인을 민족에 투사시키는 대공주의(大公主義)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이토 히로부미와의 면담에서 침략자의 야욕을 꿰뚫어보고 정곡을 찔렀던 것이나, 독립의 실천 방도로 신민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등을 만들었던 조직가의 면모로, 또 임시정부 내에서의 노선 대립을 조화시키고 독립당을 통하여 좌우익을 통합시키는 노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당대의 민족투사들이 정치에 골몰할 적에 도산은 좀 더 먼 미래를 보고자 했다.
독립 쟁취라는 당면한 목적을 위해 투신하면서도 도산이 자아혁신을 기반으로 청년 교육, 상업 개발과 같은 실질적인 실력양성으로 인적 인프라 구축을 병행한 것은 특별한 안목이었다고 생각한다. 60년대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도 도산의 뜻을 이어 받은 많은 인물들이 교육에 헌신하여 그 초석을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당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도산의 일련의 사업이 비판받았지만 그의 준비론은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티핑 포인트의 실제 사례를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조금 덜 먹고 덜 입더라도 마음 편한 것이 최고다.
집 안에 쌀 몇 섬 더 쌓아놓는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아와 물질의 균형이 무너지면 한 사람이 기울고 나라가 기운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그 엄혹한 환경에서 당장에 발등에 떨어진 압제의 불을 끄느라고 동분서주할 때도 도산이 분연히 외쳤던 것이 무엇인가. 그 수많은 선각자들 중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자아를 꺼내들고 도산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것이 도산의 가장 위대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단속하면서 정직하고 참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당장 적과 맞닥뜨린 상황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금강석은 바로 자아의 완성에 있다. 도산은 그것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고 그가 옳았다. 그 꿋꿋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손에 붓을 쥐든 돌을 쥐든 칼을 쥐든 반드시 일의 사후를 전담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을 잡기 전이나 후에나 자기반성 없이 내달린 정치 지도자들의 비극적인 말로를 보면 자명한 일이 아닌가.
위인의 행적은 기념관이나 역사책을 통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 면면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도산의 모든 위대한 독립 사업을 잊어도 중국 땅에서 화분으로 꾸몄다는 집과 미국인의 집에 청소부로 들어가 바닥을 쓸던 모습과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던 모습과 송태산장을 짓기 위해 돌을 고르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도산의 애기(愛己)의 실천이자 자신의 존재증명이었다.
무실역행과 충의용감이라는 흥사단의 4대 정신은 도산이 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에서 우러나온 바를 그대로 한 조직의 정신으로 투영시켰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많은 지도자들이 단체를 만들었지만 사후에 모두 사라지고 흥사단이 아직도 굳건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아혁신을 추구하는 조직,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은 흔들림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능히 짐작된다.
대성학교에서부터 뿌리내렸던 덕(德)체(體)지(知)를 통한 3육 또한 건전한 인격자 양성에 대한 도산 자신의 삶이 바탕이 된 것이다. 덕망을 갖춘 인격은 강인한 체력이 필수적이기에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 위에 광범위한 지식의 흡수로 전인적인 인간이 된다고 본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진정한 독립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거창한 것은 아주 작은 일을 바로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뼈저린 가르침을 주고 간 도산은 조국의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날아올라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미국 시민사회에 그 정신의 날갯짓을 지금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점검하고 생활인으로 충실하게 살며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라.’
먼 데서 도를 구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발밑에 바로 궁극의 도가 있는 것이다. 먼 데서 좋은 세상을 구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참된 자아를 향해 끊임없이 채찍질 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주체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도산의 가르침을 요약해 본다. ‘자아를 점검하고 생활인으로 충실하게 살며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라.’ 바로 이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이 정신에 따라 살아간다면 도산이 꿈꾸던 나라가 눈앞에 실현되는 것이다.
글: 홍정숙(일반부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