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사단 아카데미는 해방 이후 흥사단 운동사를 빛낸 꽃이라 할 수 있다. 1963년 창립 이래 53년의 역사가 흘렀다. ‘경제적 압축성장’과 ‘정치적 민주주의 쟁취’라는 근대화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아카데미는 역사의 한가운데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카데미 활동의 정점기는 군사독재 시기였다. 그것이 말해 준다. 아카데미가 역사의 부름과 시대적 요청에 청년으로서 사명을 다하였음을...
53년이 지난 2016년 오늘, 흥사단의 자랑스런 역사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이끌어 낸 중심세력이었던 흥사단 아카데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있다. 흥사단전국대학생아카데미연합(이하 흥대련)이 그것이다. 1개의 지역연합아카데미와 9개의 단위 대학아카데미로 구성된 전국차원의 연합조직이다. 서울지역을 대표하는 흥사단서울지역대학생연합아카데미(이하 도담: 건대, 외대, 중앙대, 경희대, 숙명여대, 숭실대, 성신여대), 숭실대‘아카’, 경기권의 평택대‘흥택아’, 안양대‘토토즐‘, 전라권의 전북대, 조선대, 충청권의 충남대, 한남대, 경상권의 경상대’흥경아‘, 창원대’흥사단창원아카데미‘가 단위 조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2017년 흥사단에게 흥대련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1963년 아카데미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흥사단 70년사』는 당시의 흥사단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12년 동안 이승만 정권 체제 아래에서의 흥사단 운동은 고난과 시련의 시기였다. 고난과 시련의 어려운 역정 가운데 불사조와 같이 활동을 해 온 흥사단 운동은 1960년 4·19 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활동을 전개할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4.19 혁명을 계기로 본 흥사단 내외의 요구와 기대는 발전, 근대화, 자유 등 세 가지였다.(흥사단 운동 70년사, 343쪽.)’ 변화를 향한 흥사단의 노력은 5.16 군사 정변으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조직발전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자 했던 흥사단의 갈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운동이 바로 그것의 분출이었다.
창립 50주년을 계기로 흥사단은 민족과 역사발전을 통한 자기발전을 모색하는 새로운 전략을 발표한다. 이른바, ‘세포의 조직과 운영 요강’이라는 것이다. 흥사단은 이를 가리켜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변화 대상은 온전히 ‘흥사단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도산 안창호에 의해 창립된 이래 1938년 3월 10일 도산이 서거한 이후 1963년까지 무엇보다도 도산이라는 지도자 한 사람의 인격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창립 이후 반세기 동안 도산의 인격과 그 영향권 내에서 존재하고 활동하던 흥사단이 이제는 시대 정세를 감안하여 발전적인 흥사단 이념에 따라 운동이 전개되고 조직이 확대 발전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흥사단의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변화의 내용은 ‘전 근대적인 정의돈수 수준에 머무는 소극적인 충원 방법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질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 또한 중요하다’는 인식을 포함하였다.(흥사단 운동 70년사, 354쪽)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통해 흥사단이 얻고자 했던 목적은 첫째, 흥사단의 변화와 발전을 통해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흥사단 운동의 근본정신과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대중조직노선을 통한 흥사단 조직의 존립과 발전이었다. 아카데미운동은 모든 지역과 세대, 계층을 망라하기 위한 대중운동노선이자, 발전적 존립을 위한 조직전략이었다. 즉, 아카데미운동은 두 가지 방향을 통해 흥사단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발전전략이었던 것이다. 하나는 민족부흥과 발전이며, 다른 하나는 흥사단의 조직발전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한 전략이었다.
2016년 오늘, 아카데미의 성공은 ‘과거’의 일이며 ‘현재’적 시각에 볼 때, 그것은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과 조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카데미는 그 명맥이 끊어졌으며, 동문조직으로만 존재할 뿐 흥사단 조직과 무관한 친목모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소중한 흥사단의 자산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흥대련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미완의 과제, ‘절반의 성공’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대외적 측면에서 1960년대가 요구했던 발전, 근대화, 자유는 주로 성장과 개발을 의미하는 경제적인 측면이었다면, 2016년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측면의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이며 민족통일이다. 대내적인 측면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흥사단 조직의 존립과 발전이다. 그렇다면 흥대련의 역사적 사명과 역할은 명백하다. 제2의 아카데미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제2의 아카데미운동의 주체가 바로 흥대련이다.
개인적으로 도산사상의 정수는 대공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대공주의에 입각하여 흥사단 활동을 해석하며, 흥사단 운동은 대공주의의 실천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공정신은 1928년 제1차 흥사단 개정 약법에서 공식화되었다. 당시 시대정신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민족의 독립이었으며, 독립운동의 분열을 막고 민족세력을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대공주의는 어떤 ‘주의’도 표방하지 않고 모든 ‘주의’와 ‘사상’을 ‘민족독립’에 종속시키는 통합사상이었다. 대공주의를 통해 도산은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을 주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흥사단의 3대 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즉, 흥사단 운동의 근본정신은 ‘대공주의’이며, 운동방향은 민족 화해와 통일 그리고 사회 모든 분야의 민주화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대공주의를 오늘날 분단문제 해결에 적용한다면, 남한내부 차원의 좌우이념 갈등의 해결이자 동시에 남북 차원의 민족통합 즉,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분단은 불완전한 독립상태이다. 완전한 독립은 통일이다. 분단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왜곡시켰을 뿐 아니라 민족분열과 이질화를 강화시켜왔다.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으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민족화해와 통일문제는 민주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민주적이지 않은 정치권력이 민주적인 통일과정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70년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해주었다. 전쟁이나 일방적인 흡수통일은 민주적이지 않은 통일방식이다. 통일은 민주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평화적이어야 한다.
70여 년 동안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대한민국이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체제로 운영되는 사회이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민주주의가 요원한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참, 가슴 아픈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흥사단 운동은 우리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민주주의운동과 통일운동을 동시에 진행하여야 한다. 제2의 아카데미운동은 아픈 시대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하는 청년들을 품에 안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구하고, 분단으로 고통 받는 민족의 아픔을 해결해야 한다. 흥대련에게 요구하는 우리시대의 요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90여 년 전 도산에게서 문제에 대한 해답의 상당부분을 찾을 수 있다. 도산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당시의 월례회는 독립운동의 노선과 방법론을 학습하고 훈련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1931년 월례회에서는 도산은 ‘민족운동가는 사회주의운동가와 연락을 취해야한다’는 주제의 토론대회를 진행하였다. 찬성편 3명, 반대편 3명에 심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토론 결과는 6대 1! 찬성편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토론자는 23세의 구익균, 22세의 김기승, 27세의 신언준, 25세의 유진동, 박창세, 47세의 장덕로였다.
나는 3가지 점에서 이 월례회가 현재의 아카데미의 과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방법론 측면이다. 도산은 토의·토론 교육라는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여 월례회 학습 및 동맹수련을 조직하였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도산의 개방성을 보여준다. 토의·토론교육은 민주주의적 의사소통방식이다. 토의·토론교육을 월례회에 적용한 도산의 목적은 단우들을 민주시민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토의·토론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훈련하여, 독립이후 민주공화국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가치적 측면이다. 토론주제가 민족의 독립이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민족독립노선과 정치참여 방안 등 국가수준의 정치적 의제를 단우 교육의 주제로 삼았다. ‘민족운동가는 사회주의운동가와 연락을 취해야한다’, ‘흥사단을 정당화(政黨化)할까?’라는 주제는 당시 독립운동노선과 방법론에 관한 중요한 의제들이다. 세 번째는 전략적 측면이다. 도산의 좌우합작운동과 정당운동으로써의 대독립당 운동노선은 월례회의 토론결과와 일치한다. 월례회의 토론결과가 실제 독립운동 전략수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마지막으로 청·장년 단우들이 어우러져 토론하는 세대간 소통과 대화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월례회 교육은 단우의 사회적 실천활동과 독립운동방식을 논의하는 공론장이었으며, 민주주의를 습득하고 훈련하는 동맹수련장이었던 것이다. 민족독립과 민주공화국 건설을 향한 눈물겨운 일상의 노력과 헌신이 도산의 흥사단 운동의 실체였으며,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EH 카아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90여 년 전 월례회를 주재했던 도산을 상상하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는 것 같다. 기쁜 상상인데, 왜 이토록 가슴이 아려오는지 모르겠다.
제2아카데미운동의 방향과 방법론, 운영방식은 90년 전 도산에게서, 그리고 50여 년 전 아카데미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만약 흥사단이 그리고 아카데미가 흥사단 운동의 근본정신과 원칙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제2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그것을 실천할 것인가, 실천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답이다.
- 글 : 정현숙(본부 협력사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