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수립 100년에 돌아보는 도산의 통합정신
지난 8월 말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도산·임시정부 탐방'을 다녀왔다. 우리 흥사단이 범시민사회단체연합과 공동으로 주최하여 중국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충칭의 임시정부 유적과 도산, 백범 등 선열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정부로 출범한 날이 1919년 9월 11일인 바 그 날짜에 즈음한 방문이어서 의의가 더 컸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 그중에서도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찾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한다.
그 첫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자취가 공적에 비해 너무 소략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성립 초기에 정부의 기틀을 잡은 것도 도산의 탁월한 지도력과 비전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3·1운동 후에 발표된 대표적인 3개의 임시정부, 즉 국내의 한성정부와 블라디보스톡의 노령정부 및 상해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실질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발족시킨 것은 도산의 열성과 희생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으며 도산의 업적과 통합 정신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함에 죄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또 하나는 상해임시정부가 초기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분열과 대립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제대로 못하였고, 독립운동 통일전선을 형성코자 한 도산의 노력이 계속 무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행한 첫 강연부터 통일을 부르짖고 호소하였던 도산은 바로 분열과 대립의 문제로 임시정부에서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게 된다. 그후에도 국민대표회의 소집, 민족유일당 결성 등 독립운동의 통일전선 형성에 매진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고 말았다. 뒤에 한국독립당 결성 등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독립투쟁의 호기를 놓친 아쉬움은 컸다. 역사에 가정이란 쓸데없는 일이지만 만일 도산의 바람대로 통일전선에 의한 대일투쟁이 이루어졌다면 독립운동의 양상과 해방 후 민족국가의 향방이 크게 달랐을 것이라는 애석함은 떨칠 수 없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단결하지 못하고 통합하지 못하여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고 독립투쟁도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함을 평생 아파했다. 1913년 창립한 흥사단은 2대강령으로 '건전인격'과 더불어 '신성단결'을 내세웠다. 건전인격, 신성단결은 도산의 핵심적인 구국운동 방법론으로서 신성한 수준으로 단결 생활을 끌어올리고, 단결력 훈련을 통해 전 민족의 단결로 승화되기를 염원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도산이 상하이에 와서 처음 연설한 것은 1919년 5월 26일 북경로 예배당에서 교민단체의 환영회 석상이었다.
"여러 가지 급한 것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통일되어야 하겠소. 대한민국 전체가 단합되어야 하겠소. …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여기 이 정부를 영광스런 정부로 만들어야 하겠소. 세상에 조소를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
3개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에 상해정부를 한성정부로 일치시키면서 도산은 내무총장에서 노동국총판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장관급에서 국장급으로 강등되는 셈이어서 상해정부를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던 젊은 차장들이 반발하며 도산의 직급을 올리려고 여러 제안을 하였다. 이때 도산은 "나는 상해에 온 이래로 통일을 위하여 무엇이나 희생할 결심임을 누차 성명하였노라. … 그러므로 한성의 정부는 일점일획이라도 개조치 말자 함이라. … 나는 결코 주장을 변하는 무신한 사람이 되지 아니하리라." 도산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통합임시정부 를 성립시켰다.
도산은 독립운동방략에 대하여 두 차례 긴 시간의 시국 대강연을 하였다. 1920년 1월 3일, 5일의 신년 강연과 임시정부 각료를 사임한 직후인 1921년 5월 12일, 17일이었다. 독립운동의 6대 방략을 논하며 통일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말하였다.
"우리 동포끼리는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여야 한다. 독립은 독립이지만 내가 네 밑으로 가랴 하는 생각은 버리시오."
"서양 기자들의 말이, '우리들의 싸움과 너희들의 싸움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싸우되 공론에 복종할 줄을 알므로 좋은 결과를 얻고, 너희들의 싸움은 시작한 뒤에 지는 편이 없는 것을 보니 공론에 복종할 줄을 모르는 싸움이라, 그러한 싸움으로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이 되므로 망할 수밖에 없다'는 박절한 말을 합데다."
"어떠한 주장, 어떤 논을 가진 자를 물론하고 각방이 다 모여들어 한번 크게 싸워 큰 해결을 지어 크게 평화하고 크게 통일하여 가지고 군사 운동이나 외교 운동이나 모든 운동을 일치한 보조로 통일 진행하기를 바랍니다."
'안창호의 통일독립'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도산은 모든 독립운동의 성패는 통일(통합·단결) 운동의 성패에 달렸다고 보았다. 그리고 공론을 세우고 그 공론에 복종하느냐에 통일이 되고 못됨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또한 도산은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본보기를 보였다. 소아(小我)의 이익보다 민족과 국가 와 공공의 이익을 항상 우선하는 대공(大公) 복무의 정신은 도산의 일생을 관철하는 바탕이었다. 나에게 한 옳음이 있으면 남에게도 한 옳음이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어떠한 외적의 침략에도 혼연히 하나가 되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수많은 국가,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다. 도산의 통합정신과 자세로 이러 한 난제에 임한다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글 : 채영수(공의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