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자의 인터넷 보도를 보면 우크라이나 키에브 부차지역 전투현장에서의 전쟁피해에 대해 강도높게 러시아군을 비난하고 지속적으로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서방측의 발표와 서방의 발표를 인용하는 언론기관들의 보도가 있었다.
부차전투는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부차전투는 1619년 3월 광해군 때 명나라의 요청에 의한 조선군 13,000명이 조명연합군 10만에 편성되어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누르하치 후금군에게 패퇴하여 8000이 학살당하고 5000이 포위되어 이틀간 굶다가 항복한 사르후전투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의 승기를 잡아 요동을 평정하고 명의 산해관을 돌파하여 북경 입성(1644)한다.
(사르후 전투)
부차전투 뒤에 명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인조반정이 있고 이미 후금군이 요동을 장악하여 중국과의 육로가 단절된 상태에도 장사치를 앞세워 명을 사대하던 서인세력은 마침내 두 번의 청국 침입을 받게 되고는 인조왕이 남한산성에서 맨발로 걸어 내려와서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에 찢고 항복하고
끌려간 포로 60만중에 50만이 여성이었으며 영의정 며느리를 포함한 환향녀를 만들었다.
후금건국 1616년 사르후 전투가 1619년이고 정묘호란이 1627년 병자호란이 1637이니 실로 그 이전부터의 연역이 있지만 불과 이십여년 사이에 그리고 십년을 주기로 혹독한 전쟁을 겪었음에서 자기 국민을 살피지 않고 사대주의로 일관하였던 일부 사대부들로 인한 결과로 참혹에 참혹을 더한 병란을 만들고 민생을 도탄에 빠졌으며 청에 복속되고 결과로 식민지 병합도 되었으며 분활도 되었다.
그럼에도 유구한 민생민족 결기가 있어서 분단된 조건에서도 만난을 이기고 우리 민족공동체가 경제번영을 일구고 우주를 쏘고 공히 국방강국을 일어서는 것은 매우 긍지 높은 것이고 계속 발전시킬 전망이며 제일로 전쟁을 방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왜 부차전투가 새삼스럽게 떠오는가? 아마도 격동하는 정세에게 매우 중요한 관계와 전략적 지역에 위치한 지역나라들이 섣불리 행동하다가 엄청난 피해 당사자가 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크라이나민족 나찌 아조프대대의 러시아인종 청소가 진행되던 중이고 이들을 지원하는 서방의 정보기관과 훈련기관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3171820001
의 활동이 지속적으로 동진하였던 이유도 있다.
이런 정세적 이유는 오늘 날 우리나라의 현황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닮아있으며 시리아, 아프칸 등에서의 미국의 후퇴와도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이런 점을 살펴서 지나친 사대와 편향적 외교정치 및 우려스럽게도 그 무슨 일본군대의 진출마저도 허용할 수 있다는 등의 관념적 사고방식에 의한 오판을 끌어내어 참변을 자초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비무장지대의 지뢰폭발 등으로 많은 군인과 민간이 살상되고 민생경제에 피해가 온 것이다.
22.04.04